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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교의 태동

상서대전(尙書大典)과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따르면,중국인들이 한국에 건너가 살게 된 역사는 고대 은대와 주대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화교 사회가 정식으로 형성된 것은 19세기인 1882년부터이다.그렇다면 제일처음 한국에 이주한화교는 누구일까?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보면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화교가 한국으로 이주해 왔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며 모든 단체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 19년(1882년) 6월 9일 일본이 조선에서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청조는 조선을 돕기 위해 광동성 수사제도(水師提都)인 오장경(吳長慶)과 3,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청조 군대는 세 척의 군함과 양 척의 상선으로 나누어 산동성 연대에서 출발하여 한 달 후인 7월 12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 수는 약 40여 명이었다. 기록상으로 볼 때 이 40명이 한국 화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본래 한국에 머물러 있는 청군을 도와주려고 온 것이었는데 청군이 한국에 오래 머물게 됨에 따라 점차 한국인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초기 2-3년 동안에 이들의 상업 활동은 청조의 보호정책과 오장경 제독의 보살핌을 받아 매우 순조롭게 발전하였으며 후대 화상들이 상업 활동을 벌이는데 공고한 기반을 다져 주었다. 화교 경제의 발전은 청조의 "병상통일주의(兵商統一主義)"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1882년 청군이 주둔한 지 한달후 청조는 즉시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청과 조선간의 무역관계를 맺었다. 12년 후인 1894년 11월 양국은 청상보호규칙(淸商保護規則)을 제정하였는데 이때가 화교들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전에는 조선의 상업권이 완전히 일본인의 손에 있었다. 조선과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어 오랫동안 폐쇄정책을 펼친 조선 사회를 개방시켰으며, 1882년 6월까지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의 수는 3,622명에 달했다고 한다.

1882년 이후 일본 항구도시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일부 화교들도 일본인들을 따라 조선에 건너와 부산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1884년 한국의 대도시에 있는 화교의 숫자는 크게 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울의 화교 숫자는 약 350명 정도로 약 4배 가까이 늘었다. 인천도 235명으로 늘었는데 그 이유는 산동반도와 인천항 사이에 정기적으로 배가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선과 여객선의 운행으로 화교들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져서 서울과 인천의 화교 수는 더욱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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