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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교의 성장

19세기 후반, 초창기의 화교들은 국내에 정착하는데 있어 오늘날처럼 거주 허가증이나 각종증명서류 같은 번거로운 수속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화교들이 서울과 인천을 근거지로 하여 정착해서 직물 수입, 수입품 잡화, 옷감 장사, 피혁, 서구 수입품, 조선 토산품의 수출, 정기 여객선을 이용한 행상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할수 있었다.

당시조선사회는 상업이 세분화 되어있지 않아 화교들은 여러가지 상업 활동에 모두 종사할 수 있었고 이는 조선 사회와 조선 상인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초기 화교들은 중국 정부의 정책적 도움을 받아 일본인을 제외하고 조선에 가장 많이 거주한 외국인이었다.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으며,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 이곳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이다. 그리고 이후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에는 부산, 1889년에는 원산에 조계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인천에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명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인천 조계지 내의 화상들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은 날로 흥성하게 되었다. 또한 1898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도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1884년 35척의 청조 선박이 인천과 마포항을 왕래하였으며 1만 3천톤의 화물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화교들의 활동 범위가 날로 확대되어 가면서 공관과 중화회관을 중심으로 한국인들과 접촉하는 횟수도 날로 많아졌으며 이로 인해 화교들과 한국인들간의 충돌도 점점 많아졌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1883년 7월부터 1884년 9월까지 한국과 화교간에 발생한 채무 분쟁이 15건이며 액수는 30687량에 달했다. 정착 초기에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지리적 환경이 달라 한국인들과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 가운데에서 침략자 일본의 이간책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20년대의 10년 동안 화교의 경제력은 막강하였다. 특히 20년대의 후반기인 1927년 전후에는 화교의 경제활동이 가장 막강했던 시기였다. 서울과 인천에 분포해 있던 화교 무역 상인들은 주로 비단, 옷감, 면화, 양식, 고추, 마늘 등 각종 토산품을 중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한 후 다시 한국의 전역으로 판매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과 인천 양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의 수는 약 6천명 정도였다.
이들이 40년간 중국으로 보낸 액수는 1천만 엔에 달했다. 당시 경성 시민 중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사람은 화상 동순태(同順泰) 사장인 담걸생(譚傑生)씨였다. 1920년대 화상이 경영하는 상점들은 대체로 잡화점, 비단가게, 양장점, 이발소 등이었으며 후반기에는 요식업이 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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