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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교의 위축과 이동

해방 후,정치적 혼란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였을 때, 華商은 일제시기에 형성되어 있던무역망을 이용하여 크게 일어선다. 1946년 전체 무역수입총액의 82%를, 1948년에는 52.5%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화교 사회의 이 같은 경제호황은 1948년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되면서 막을 내린다. 그 후 화교 사회는 우리 정부의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 대우 아래 위축되어 가면서 화교의 이동이 본격화되었다. 1948년 수립된 우리 정부는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화교의 한국 유입은 종식되었다. 더불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성립되면서 이주억제책으로 외국 이동을 금지하여 일년에 한번 있던 한국 화교의 고향 방문도 끊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화교 무역의 배경이었던 중국과의 교역도 불가능해지면서 화교들은 한국에 정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제시대 한국 내 화교 여자의 수는 적어서 그 비율이 전체 화교의 26% 정도였다. 해방 이후 고향에 돌아갈 길이 막히자, 사회경제적 안정을 위해 재혼하고 결혼적령기의 화교 남녀들도 한국 내에서 결혼하였다. 이에 따라 화교 남자와 한국 여자와의 결혼이 증가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직전부터 한국 화교는 사회경제적 난관을 겪는다. 자유당 정부가 6·25 직전 전국에 내린 창고 봉쇄령으로 화교 무역상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어 내려진 외국인에 대한 외화 사용 규제책은 화교의 무역업에 족쇄를 채운 격이었다. 이로 인해 화상들은 국내 기업과의 경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차 도태되어 한국 화교의 경제 활동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또한 자유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 아래 두 번의 통화 개혁이 있었다. 화교들이 현금 소지를 선호하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두 번의 통화 개혁을 통하여 화교들의 현금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만다.

그 외에도 이승만정권(1948∼60)때 화교들의 대표적인 직업인 중국음식점에 대하여 불리한 세율을 적용하고 음식값을 통제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박정희정권(1961∼80)때인 1961년에는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의 시행에 따라 토지를 소유한 외국인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970년에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한국 화교는 1가구에 1주택 1점포만 허용되고, 주택 면적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된다. 또한 취득한 토지의 건물은 자신만 사용하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 없었다. 논밭이나 임야의 취득도 불가능하였다.

화교가 한국에 온 이래 채소 경작은 그들 주요 생업의 하나였다. 그러나 밭의 소유가 불가능하게 되자 화교 농민들은 더러 그 소유권을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 아내나 한국인 친구의 명의로 해두고 경작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경작지의 소유권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빈번하였다. 상점과 주택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국 화교는 게다가 또 외국인 거류 제도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한국에는 영주권 제도가 없기에 화교들은 외국인으로서 「외국인 출입관리법」을 따라야 한다. 외국인은 거주자와 비거주자로 분류되고, 거주자는 2년에 한번 비자를 받아야 했다. 1997년부터 그것이 5년에 한번으로 바뀌어 다소 사정이 나아졌다.
재입국제도는 현재는 복수로 되어있어 1년에 여러번 출입국이 가능하나, 기한 내에 반드시 돌아와야 거주자 자격을 유지하게끔 되어 있었다. 화교들이 이른바 보따리장사로 해외에 다니다가 기한 내에 재입국을 하지 못해 거주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대만으로 유학간 화교학생으로서 재입국 기간을 넘겨 거주권을 상실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 기간 음식점은 화교의 전형적인 생업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화교는 음식업에서도 여러 제한과 차별대우를 겪어야 했다. 그리하여 한때 4천여 개가 되던 중국음식점이 현재 대략 천여 개 업소로 감소하였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음식업에 많이 참여하면서 화교음식점의 경쟁력이 약화된 점도 물론 여기서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여하튼 이러한 차별과 제한을 견디지 못한 화교 음식업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 음식점을 차렸으니, 그 수가 2천여 개나 된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으로 한국 화교의 인구는 점차 감소해간다. 이들은 7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하여 호주나 대만 등지로 이주하였다. 한국 화교 출신의 연합체인 韓華聯議會에 의하면 60년대 말까지 4만 명을 헤아렸던 화교들 가운데 2만명 이상이 70년대이래 외국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남가주지역에만 현재 8천여명의 한국 화교 출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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